“겨우 한 달 동안에 식은 밥덩이나 얻어먹을 만큼, 또는 피곤한 몸에 하룻밤의 휴식을 줄 만큼.”

영순은 생각하였다. 이 어떻게 비참한 자기의 현실이냐고, 그리고 모순이냐고…….

그에게는 산해의 진미가 보였다. 금전옥루(金殿玉樓)가 비추었다. 천하의 미인의 아양 부리는 얼굴이 나타났다. 역사가 보였다. 위인의 화상이 보였다. 찬송가가 들리었다. 염불 소리가 들리었다.

이것이 모두 영순에게는 환영이었다. 그가 거의 병적으로, 발작적으로 보던 환상이었다. 그리고 다시 더욱 분명히 눈에 나타나는 것은 그가 매일 다수히 주무르는 금고에 가득한 돈이었다. 지화(紙貨) 뭉치였다. 그는 그것을 종로 네거리에서 내어 뿌려보았다고 생각하였다. 바람에 날리어 이리로 저리로 날아 흩어졌다. 길가는 사람들이 모두 덤비어들었다. 늙은이도, 젊은이도, 거지도, 부자도, 신사도, 학생도, 미인도, 노동자…….

영순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떠한 나라에 방황하는 듯하였다. 자기가 다리를 붙이고 선 곳이 어디인지를 거의 의식하지 못할 듯하였다. 그는 이만큼 머리에 혼란을 느끼었다. 다시 부르짖었다.

‘섣부른 양심을 버려라! 미숙한 생활욕을 끊어버려라! 그리하여 그 양심과 생활욕을 뒷동산 양지 끝에 꽝꽝 단단히 파묻어라!그리고 한 번 놀아보자!’라고…….

그는 발을 돌이켜 창경원 앞길의 정적을 버리고 종로통의 열시(熱䦙)로 다시 향하게 되었다.

영순은 이와 같은 혼란한 태도로 거의 발작적으로 따라가는 곳은 어디일까? 또는 무엇 하러! 창경원 연못에서 나는 학의 울음이 길게 들리었다. 차차 길어가는 초봄 해도 벌써 서편 하늘에서 그 얼굴을 감추어버렸다.

영순이가 이와 같이 발작적으로 흥분하여 무의식적으로 따라간 곳은 그가 근무하는 회사였다. 그 회사는 어느 개인이 경영하는 곳이었다. 영순은 그 회사의 충실한 사원 가운데의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여관으로 돌아가던 영순이 무슨 까닭으로 다시 그 회사로 발길을 돌이켰을까? 더구나 무의식적으로…… 발작적으로…… 어찌하여? 몇 시간 뒤에 연출한 영순의 행동이 그렇게 발길을 돌이킨 이유를 웅변으로 보여주었다.

영순은 밤이 깊으려 할 때에 종로 네거리에 나타났다. 종로경찰서의 탑상(塔上) 시계 장침은 Ⅹ를 가리켰다. 단침은 Ⅸ를 가리켰다. 영순은 저 한 사람뿐이 아니다. 동료 이, 삼인과 함께 남대문통으로 무엇이라 떠들며 걸어갔다. 거들며 걸어가는 영순의 모양은 극히 흥분해 보였다.

“그런데 여보게 자네, 오늘 저녁에 웬일인가?”

라고 묻는 친구의 말이 들리었다.

“웬일이란 무슨 말이야. 사람이란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 게지……. 영순, 나는 벌써 전달 영순이가 아닐세…….”

라 대답하는 흥분한 영순의 말소리가 들리었다.